어질다는 것의 도(道)
탈무드는 어진자들의 대화다.
현자는 곧 스승이고, 승리한 자이며, 종교가임을 경전 전반에 걸쳐서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종교가 반드시 명상이나 격리된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매우 은근하고도 부족함이 없는 설명을 하고 있다.
나는 탈무드를 입시교육의 각박함 속에서 인생을 담보된 채 살아야하는 꿈많고 낭만적인 사춘기에 읽어왔으며, 그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
반드시 종교적인 권위를 인정받지 않아도, 어진자는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 순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무드에도 아직까지 의문점이 남아있다.
그토록 지식의 민주화를 주장하는 랍비의 세계에서, 랍비 요한나, 랍비 아키바, 랍비 히렐 그들 모두 예수의 경지에 이를만큼 어진자이면서도 왜 예수를 부인하는가
그리고, 탈무드는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어쨌거나 유대인의 지식을 가르쳐주는 자에 대한 애정은 각별한 것이고, 모든 유대인의 공통점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내게는 가혹한 의미를 다가왔고, 나는 그 우울함(?)을 달랠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탈무드를 가치있게 여기는 이유는 그들의 지식 세계라는 것은 적어도 어떤 종교나 학문이나 예술의 세계에 국한되고 경직된 것이 아닌 자유로운 탐구의 세계라는 것이다.
비록 랍비들이 천재였고 동시에 훌륭한 영재 교육을 받은 특수한 계층이었다고는해도, 어쨌든 다소 문제점이 있는듯한 이 상류층(?)들은 그들의 본분을 다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이 사회는 상류층과 평범한 사람으로 분류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본분이 있으며, 이는 또다른 지식의 세계를 열어줄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탈무드가 내게 바다로 다가오는 우울한 세계였듯이, 평범한 사람들이 아주 많은 이 세상은 그만큼의 즐거운 세계이길 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