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4 공화국(군부정권)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통해 본 지금의 경제상황과 민주주의의 발전
3, 4공화국(군부정권)의 이데올로기 대립
* 문제제기-군부 정권이 지배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이용했고, 저항이데올로기와의 어떠한 대립이 있었는가.
* 목차
Ⅰ. 지배이데올로기
-지배이데올로기가 국가민족주의를 어떻게 이용했는가(이데올로기의 활용)
Ⅱ. 지배이데올로기가 생겨나게 된 배경
Ⅲ. 저항이데올로기와 지배이데올로기의 갈등
Ⅳ. 맺음말
Ⅰ. 지배이데올로기
- 지배이데올로기는 국가민족주의의 변형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우선 간략하게 이야기하면 경제발전이 중요한 시기에 관료주의적 통치체제가 중요하다고 역설, 그렇게 하면 경제가 발전하고 조국 근대화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군부세력은 자유민주주의는 조국근대화를 위해 유보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게 되었고, 또한 자유민주주의보다는 반공논리가 더 중시되었으며, 경제발전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모든 역량을 동원, 투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일련의 성격이 조국근대화라는 말로 선전되었다. 조국근대화는 1960년대 비 서구사회에서 모색되었던 급속한 경제발전의 열망을 담았던 근대화론의 수용이었다. 즉, 강한 국가로의 발전을 합리화 시켜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위로부터의 강제라는 것에 대해서 한계성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국가는 특정 지도자의 세력과 결부되며 민족구성원의 절대복종의 강요라는 것에 이어진다. 이러한 관계를 설정해서 정통성의 명분과 사회적 통제를 마련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들의 기본내용을 보면 기업가의 경제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조치로, 저임금 노동 정책 등의 강력한 지원에 의한 급속한 자본축적이 있는데, 여기서 많은 빈부격차가 생겨났고 또한 중심부 국가와의 교역으로 수출 주도적 경제성장을 꾀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학생들의 의식고양이 이루어 졌으며 또한 노동자들의 억압으로 인한 반발로 전태일 같은 열사가 생겨났으며 둘은 서로 같은 정부에 대한 반감으로 연합했으며, 이로써 많은 사회적 문제와 균열을 자아냈다. 예를 들면 지금의 노사간 문제도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Ⅱ. 지배 이데올로기가 생겨난 배경
간단하게 말하면 그때 당시에는 경제적인 빈곤이 극심했을 때다. 그래서 군부세력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 경제발전을 꾀했으며 그것으로 인해서 민주주의는 침해돼도 된다라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 또한 빈부격차라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감수해야한다는 묵시적인 합의를 만들어 내었다.
Ⅲ. 지배이데올로기와 저항이데올로기의 대립
1. 반공주의 대 민족주의
오랫동안 동질적인 민족공동체와 독립된 전통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던 우리나라는 일제통치와 민족독립운동을 통하여 전통적인 민족공동체를 하나의 집단적 의식 주체로 성숙시키고 독립 이후 자주적 민족국가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민중의 의식의 동원화를 가능하게 하였던 민족주의 이념은 전통사회와 식민지 사회의 계급의 형성과 재편성, 식민통치의 성격과 식민지 사회 구성의 성격, 운동의 주도세력의 성격에 따라 우파 민족주의나 좌파 민족주의의 헤게모니(: Hegemonie 어떠한 일을 주도하거나 주동하는 지위 또는 권리. 주도권. 패권.)로 나타난 바 있었다. 그러나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특히 해방 이후부터 이러한 일반적 사례와 비교할 때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에서 분단국가의 형성은 민족과 국가라는 역사적 연계의 급격한 단절을 의미한다.
하나의 민족 내에 두 개의 국가라는 분단조건, 그것도 그 어떤 국가 사이의 관계보다도 가장 적대적인 분단국가의 조건하에서 민족공동체에 기반을 둔 통일국가의 이념은 그 논리적, 내용적 근거를 상실한다. 분단국가의 창출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형성된 민족이념과 정서를 간직한 민족이라는 집단적 의식 주체를 해체시켰다는 의미에서 과거에 뿌리를 두지 않는 외생적이며 작위적이며 생경(세상의 사정에 어둡고 완고함)한 정치의 구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공주의가 이데올로기적 현실성과 더불어 민중들로부터 이념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엄청난 비극을 대가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화와 정치교육을 통한 세대와 세대 사이의 반공이념의 전수는 시간의 침식효과와 더불어 약화되어왔는데, 더욱이 전쟁의 비경험세대가 인구의 다수를 점하게 되면서, 그리고 반공주의로 뒷받침되었던 냉전적 조건의 변화와 더불어 점차 학생과 민중들에 의해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반공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은 4.19 혁명 이후 학생과 노동 운동의 일각에서 민족통일 운동으로 표출된 바 있었다.
2.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
정치적 권위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분단국가 수립의 쌍생아라 할 수 있다. 그것이 분단국가로 구체화되었듯이 남한이 동아시아의 강고한 반공의 보루(堡壘: 어떤 일을 하기 위한 튼튼한 발판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가 되어야 한다는 미국의 정책 목표는 다수 민중의 여망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권력 블록은 처음부터 강력한 경찰, 사법기구를 가지는 국가기구로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었으며, 집권세력도 방대하고도 효율적인 국가기구를 관장하면서 권력유지에 필요한 정치자원을 용이하게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그들은 모든 사회적 가치와 정치의 판단기준을 반공 아니면 용공좌경이라는 양분법적 척도를 통하여 체제에 도전할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세력으로 규정하고 탄압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집권세력은 모든 정치적 요구의 표출을 치안의 차원으로 전치시킬 수 있었다. 이 점에서 독재정치는 반공 헤게모니를 확립하기 위해 구축된 과대한 국가성장의 구조적 산물이라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협애한 민중적 기반 위에 섰던 당초의 지배권력 연합의 분열은 이승만 체제로 하여금 한국전쟁으로 반공이념의 헤게모니가 한꺼번에 뿌리를 확대하고 있었던 유리한 환경하에서도 전쟁의 직접적인 충격의 여파가 끼쳤던 시간 이상을 존속할 수 없게 하였다. 4.19 혁명은 반공 헤게모니 내에서 민주주의 이념을 교육받은 도시 중산층과 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민주화투쟁으로서, 민중봉기적 방법 이외에는 정치적 요구를 조직화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조건하에서 오로지 무장하지 않은 민중의 힘만으로 거대한 권력구조를 붕괴시킬 수 있었던 대사건이었다. 그것은 또 이후 정치변화의 모델을 제시하게 되었다. 시민민주주의 이념은 권력연합에 대항하여 전 민중의 저항적 힘이 결집될 수 있는 이념적 응집 기능을 하게 되었다. 10월유신하의 민주화 운동은 결국 박졍희 정권의 붕괴를 가져왔다.
3. 발전주의 대 민중주의
반공주의가 '팍스 아메리카나'의 정치철학이라면 발전주의는 그것의 경제철학이다. 발전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 박정희 정권 때부터이며 이를 보다 체계화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에 이르러서였다. 이것은 경제개발계획으로 집약되는 국가 주도하의 기술관료적 계획을 통하여 구체화되었고 그로부터 10년 뒤 유신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활용되었다. 발전주의 논리는 민족국가를 기본 구성단위로 하며 참여자 누구나가 그들의 능력에 따라 부와 이익을 획득할 수 있는 자유경쟁의 원리에 따르는 세계경제체제를 상정한다. 따라서 발전주의는 한 나라 안의 인적, 물적 자원을 어떻게 최대한 효율적으로 조직하느냐 하는 총량적 공리주의의 논리와 타국과 세계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으로부터 살아남아야 된다는 경제적 민족주의를 발전시킨다. 이러한 발전주의의 이념은 총화, 안정, 질서를 교리로 삼는 군부권위주의와의 기능적 상보관계, 즉 개발과 독재가 연결될 수 있는 고리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반공주의와 권위주의는 발전주의와 접목됨으로써 비로소 이 이념들이 소극적, 방어적 내용으로부터 보다 적극적이며 공격적인 이념요소를 내포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 군부 엘리트, 자본가, 기술관료 지배권력 연합은 이 발전주의를 매개로 하여 신중산층과 민중 부문의 상당 부분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발전주의 정치동맹을 형성할 수 있었다.
대조적으로 경제적 민주주의는 발전주의 정책으로부터 배제되거나 소외된 사회집단을 포괄하는데, 이는 고전적 사회주의의 생산과정과 관계에 기초하여 엄격히 계급적 성격을 부여하기 어려운 노동자, 도시빈민, 하급중산층, 농민등의 광범위한 민중계층의 성장과 궤도를 같이한다. 그것은 좁게는 사업장의 생산관리 및 과정뿐만 아니라 크게는 정치과정의 참여를 통한 성장과 부의 공정한 사회적 배분을 그 중심 내용으로 한다.
Ⅳ. 맺음말
박정희 정권은 군부세력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경제개발을 꾀했고 이를 위해 반공주의를 주입시키고 권위주의, 발전주의를 정당화시켰다. 그로인해 우리나라의 경제가 발전한 것은 사실이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전태일과 같은 역사의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또한 지배이데올로기에 반해 저항 이데올로기가 생겨났고 결국 박정희 정권은 무너지게 되었다.
물론 역사에 대한 판단은 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경제성장만이 국가의 목표가 될 수 있는지,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삶보다 국가의 이익이 중시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