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C 감산- 미국 증산 '정면충돌'..흔들리는 원유시장
[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계속된 미국 원유재고 증가에도 태연해하던 투자자들이 서서히 불안을 느끼고 있는 모습이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감산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우려로 최근 유입된 원유선물에 대한 헤지펀드들의 베팅이 식을 경우 유가 하락폭이 의외로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고개를 들고 있다.
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거래된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4월 인도분은 전날보다 2.86달러, 5.4%나 급락한 배럴당 50.28달러로 마감했다. 유가 하락률은 최근 1년1개월만에 컸고 유가 수준도 지난해 12월15일 이후 근 3개월여만에 최저수준이었다. 브렌트유도 하루만에 2.81%, 5.0%나 추락해 배럴당 53.11달러를 기록했다. 이 역시 지난해 12월7일 이후 최저였다.
미국 원유재고가 예상보다 많았던 게 시장 충격으로 작용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지난 3일로 끝난 주간의 국내 원유재고가 820만배럴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시장 전문가들은 200만배럴 정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예상보다 4배 이상 급증한 것이다. 미국 원유재고는 9주 연속 늘었고 1982년 통계 집계 이후 역대 최고수준이다. OPEC 주요 산유국의 감산에도 불구하고 미국내 원유재고가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는 점은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이날 칼리드 알-팔리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도 미국 휴스턴에서 열리고 있는 CERA위크 컨퍼런스에서 기자들과 만나 “글로벌 원유 공급이 OPEC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더디게 줄어들고 있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더구나 이날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월간 보고서를 통해 미 석유 생산이 올해 증가세로 돌아서 내년에는 이전 최대 호황이었던 1970년대의 생산량을 웃돌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당시 하루 평균 960만배럴을 생산했고 이후 산유량이 줄어 1999년에는 하루 590만배럴로 줄었다. 그러나 올해는 일일 평균 921만배럴, 내년에는 973만배럴로 1970년대 산유량을 웃돌 전망이다. 이는 지난해 11월 전망한 898만배럴과 953만배럴에서 상향 조정한 것.
마이크 위트너 소시에떼제너럴 원자재 리서치대표는 “원유시장은 서서히 인내심을 잃고 있다”며 “지난해 12월에 OPEC 감산 합의 이후 큰 상승랠리를 보였는데 올들어 OPEC 산유국들이 일평균 100만배럴 이상 감산한 이후에도 미국 원유재고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게 최근 데이터로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미국 컨퍼런스에 참석한 사우디와 러시아 석유장관들은 감산 노력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고 이라크와 멕시코 대표들도 “감산 노력이 실제 시장에서 효과를 내고 있다”고 옹호했다.
문제는 최근 유가 상승 또는 안정에 기여했던 헤지펀드 등 투기세력들의 원유선물 매수세가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지난주만 해도 원유선물과 옵션시장에서의 투기 매수는 최대수준인 10억배럴 정도나 된다. 존 킬더프 어게인캐피탈 파트너는 “투기 매수세가 사상 최대수준에 근접하고 있어 자칫 시장상황에 따라 엄청난 이탈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사우디와 러시아 등의 발언이 시장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 의식해선지 지난 1일 2년 5개월만에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졌던 시카고옵션거래소(CBOE)에서의 원유 변동성지수(VIX)도 최근 두 달만에 가장 높은 수준까지 반등했다. 프랑스 최대 석유업체인 토탈을 이끄는 파트리크 푸야네 최고경영자(CEO)도 “현재 원유시장은 호재와 악재가 공존하고 있다”고 말한 뒤 “재고가 줄어들지 않는 한 원유가격 변동성은 커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알-팔리 장관도 이날 1월에 시작된 OPEC 국가들의 감산 합의를 더 연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뒀다. 그는 “감산 합의가 연장될지 여부는 결국 원유재고가 얼마나 빨리 평균수준으로 되돌아 가느냐에 달려있다”고 했다. 사우디는 아람코 기업공개(IPO)라는 대형 이슈를 앞두고 있는 만큼 유가가 계속 하락하도록 내버려두기 어려운 상황이다. 모함마드 바르킨도 OPEC 사무총장도 원유재고에 대해 덜 우려했다. 바르킨도 총장은 “흔히 시장 참가자들은 통계가 잘 잡히는 미국 지표를 주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미국 이외 국가들을 보면 원유재고는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에삼 알-마르조크 쿠웨이트 석유장관은 “지난달 기준으로 보면 비(非) OPEC 산유국들은 감산 합의를 50~60% 밖에 지키지 않았지만 OPEC는 당초 목표보다 훨씬 높은 140%의 이행률을 보였다”며 결국 유가가 안정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다. 쿠웨이트는 오는 26일 OPEC와 비OPEC 산유국들의 감산 합의 이행을 점검하는 회의를 주제할 예정이다.
이정훈 (futures@edaily.co.kr)